목장훈련교안

작성자 Admin(admin) 시간 2019-12-26 15:17:01 조회수 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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④ 희망에 집중-주의 나라

 

[본문:마태복음 6:9-10]

 

9.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10.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우리는 계속해서 희망을 그 주제로 말씀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희망은 인간의 삶에 중요한 삶의 목적이자 삶을 역동있게 만드는 동기가 됩니다. 만일 신자의 삶에 희망이 빠져 나간다면 그의 삶은 암울하고 고독할 것입니다. 하지만 삶이 고통스럽고 힘들지라도 희망의 빛이 그의 삶을 비추고 있다면, 그의 삶은 다시 비상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그동안 세가지 주제로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그 주제는 희망-예수그리스도, 하나님의 뜻, 교회(에클레시아)이었습니다. 인간이 갈구하는 희망은 세상 안에 놓여있지 않고,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음을 확인했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하신 하나님의 뜻을 찾고, 그 삶의 기초를 교회(에클레시아) 안에 둘 때, 참 희망을 발견하고 희망적인 삶을 살 수 있다는 메시지를 받았습니다. 특별히 교회는 주님이 직접 세상에 세우신 영적 기관이며, 하나님의 구속 사역의 완성은 교회를 통하여 완성될 것입니다. 교회가 여전히 불완전하고 미약할지라도, 교회의 머리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가 그 부족함을 메꾸시고, 불완전함을 온전함으로 바꾸시어 그의 사역을 온전케하시는 것입니다. 금주는 한걸음 더나아가 인간의 궁극적인 희망의 영역이 되는 주의 나라에 대해서 말씀을 생각하도록 하겠습니다.

 

 

주의 나라

  기독교 신앙에 중요한 주제가 되는 것이 주의 나라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도 주의 나라의 건설에 있기 때문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로마의 압제 하에 주권과 영토를 빼앗기고 속국으로 전락하여 바굴한 삶을 살아가고 있었던 때였습니다. 그런까닭에 자연스레 이들은 로마에서 구출해줄 메시야를 대망하였고, 그렇게 하여 메시야로 오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당시 강력한 종교적 리더쉽을 발휘하고 있었던 침례요한도 예수님을 이스라엘의 메시야임을 자인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한이 대답하되 나는 물로 침례를 베풀거니와 너희 가운데 너희가 알지 못하는 한 사람이 섰으니, 곧 내 뒤에 오시는 그이라 나는 그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요한복음1:26-27) 유대인들이 메시야를 대망했던 이유는 그들의 삶에 어두움과 절망이 현존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이 느끼는 절망감은 당시 피지배 민족들이라면 모두가 느끼는 현실적인 공포감이었습니다. 로마가 가해오는 정치적 종교적 압박한 상당했고, 특별히 젊은 세대들은 느끼는 무력감은 그 이전세대보다 더 강하게 다가왔습니다. 이러한 어두운 상황에 예수 그리스도가 세상에 오셨고, 그들에게 주의 나라를 선포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선포한 주의 나라는 유대인들에게 강한 희망의 근거가 되었고, 모두가 소망하는 공동체의 주제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주의 나라는 유대인들이 원하는 그들의 땅, 곧 팔레스틴에 건설하는 나라가 아니었습니다. 주의 나라는 현실 너머에 있는 나라이며, 그것은 지리적 공간적 개념이 아니라, 통치의 개념이었습니다. 실질적으로 유대 땅을 장악하고 있는 로마를 무력화시키거나, 뒤 엎을 수 있는 전능한 나라가 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주의 나라는 우주적인 통치를 말하는 것이며, 그 통치는 하나님 스스로 결정하시고 그의 통치권 앞에 결국에는 무릎 꿇게하시는 것입니다. 그의 통치는 로마라는 한 국가를 좌지우지하는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이 만드신 온 천하 만물이 그의 통치아래 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주의 나라 곧 주의 통치는 로마도, 유대 땅도, 전세계 모든 민족과 나라도 그의 경영 앞에 순종해야하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 희망이 있는 것입니다. 신자된 우리가 하나님의 통치를 받아들이고, 그의 경영에 순종하면, 반드시 그의 주권으로 심판하여 승리하는 때가 도래한다는 것입니다. 희망은 여기가 아니라 거기이며, 인간의 때가 아니라 그분의 때에 있는 것입니다. 신자는 척박한 오늘을 살아가지만 오늘을 보고 가는 자가 아니라, 현실너머 도래할 그날을 보고 가는 자입니다. 희망은 땅에 있지 않습니다. 희망은 주의 재림 때에 들어가게될 하늘나라에 있습니다. 이 통치를 받아들이는 자에게 지속적인 희망이 주어지고, 계속적인 소망이 발현되는 것입니다.